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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회화"의 기계적 진화 또는 변이

정치영의 근작들

19세기 초 요한 볼프강 폰 괴테(J. Wolfgang von Goethe)는 색채를 외부세계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다루던 기존의 관점을 폐기하고 그것을 몸이 경험하는 생리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관점을 제시했다. 그가 제기한 시각생리학(physiology of vision)의 관점에서 보자면 “빛의 몸 등록의 형태인 색채는 항상 잠재적으로 ‘아토피적인(atopic)’ 것”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의 말대로 괴테의 시각생리학적 관점과 더불어 이제 “몸 조직의 신경 씨실 내에 삽입된 색채는 신경 시스템 그 자체의 시간성, 신경 시스템의 피로, 신경분포의 필연적 리듬에 종속된 어떤 것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다면 “빛을 그린다”면서 화구를 들고 작업실을 벗어나 야외에서 작업한 인상주의 화가들은 모두 괴테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눈으로 직접 대면한 감각의 현실을 캔버스에 사상하고자 했다. 뒤샹이 ‘망막 회화 retinal painting’라 지칭했던 인상주의적 접근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양산했지만 회화사에는 또한 이렇게 망막에 포획된 상태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망막 회화’는 눈에 해롭다. 말년의 모네는 심각하게 손상된 시력으로 거의 장님 상태에서 작업했고 ‘잔상’을 연구한다면서 맨눈으로 태양을 바라본 페히너(G. Theodor Fechner)도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빛은 모든 보는 행위의 근원이지만 예민한 눈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기도 한 것이다.

정치영의 전작 중에는 3D영화인 ‘Infection’(2006)이 있다. 그는 언젠가 이 영화를 회고하면서 “상상초월의 조명”과 “토할 것 같은 몸의 쏠림”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렇게 몸이 기억하는 강도 높은 자극은 이후 정치영 작업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열린 개인전 <Deus Otiosus>에서 정치영은 파스텔 톤의 핑크를 전면에 내세웠다. 미술비평가 이근용이 “사라지는 듯한 ‘잔영’의 중간 색조”로 명명한 핑크빛 회화는 사진 같은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그것을 빛바랜 사진처럼 보여준다. 즉, 이 작품들은 마치 오랜 기간 직사광선의 공격을 받아 손상된 사진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 핑크빛은 보기에 따라 매우 자극적일 수 있는 이미지의 의미를 완화, 또는 중화시켜주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또 어떻게 보면 그것은 강렬한 햇빛이 지배하는 맑은 날 오후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본 세계 같기도 하다. 폴 비릴리오(Paul Virilio)가 말했듯 선글라스를 끼는 사람은 빛, 특히 자동차나 영화관에서 만나는 기계들이 “목표를 겨냥해 빛을 쏘는 무기”라는 것을 안다. 따라서 선글라스를 낀 사람은 “자기망막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셈”이다. 선글라스는 “무엇보다 망막의 황반 지역, 특히 가장 날카로운 감각들이 치명적으로 꽂히는 그 작은 중앙의 오목한 구멍을 감춰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Deus Otiosus>에서 정치영이 제시한 작품들을 보면 여기에는 확실히 ‘빛의 만개’가 존재하지만 그 빛은 강도가 완화된 상태, 몸이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준으로 중화된 상태에 있다. 그 작품에 작가가 부여한 제목 가운데 하나는 “On a Clear Day You Can See Forever”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당신이 영원히 볼 수 있는 어떤 맑은 날” 정도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치영의 회화는 “빛의 회화”라 할 만한 것이지만 그 빛의 회화는 무조건적인 ‘빛’의 수용, 예찬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이다. 차라리 그것은 빛을 감수하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화가의 몸에 관한 회화라 할 만한 것이다. 때때로 이 작가는 도니 톤도(Doni Tondo)라 불리는 둥근 캔버스에서 작업하는데 그 캔버스의 둥근 형태는 내게 안구나 렌즈의 둥근 모양새처럼 보인다. 좀 더 최근에 이 작가는 천을 클로즈업하여 촬영한 이미지를 그린다. ‘빛의 만개’를 시사한 전작들과는 달리 이 작업들은 빛이 차단된 상태, 또는 빛의 개입을 최소화한 상태를 시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업들에서 재현된 천은 커튼과 같은 기능을 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 주름진 천은 전작들의 뿌옇고 탁한 핑크빛 레이어의 물리적 연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들은 여전히 빛과 눈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우리의 눈은 천의 주름을 따라 빛과 그림자, 표면의 이쪽과 저쪽을 더듬는다. 그러나 이 경우에 광원(光源)은 전작들과는 달리 천(또는 캔버스)의 바깥쪽이 아니라 천 안쪽에 자리한다. 앞서 적용한 몸의 비유를 다시 적용한다면 여기서는 망막의 저쪽(몸 바깥의 세계)이 아니라 망막의 이쪽(몸 안쪽의 세계)이 좀 더 중요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빛 기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Deus Otiosus> 시절의 전작들은 외부의 밝은 빛을 문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에 견줄 수 있다면 최근의 천 작업은 빛을 바깥이 아니라 안에 둔다는 점에서 광원이 기계 안쪽에 존재하는 라테르나 마기카(Laterna Magica)에 견줄 수 있다.

 

그런데 마침내 그 천을 걷어 올린다면 거기서 우리는 무엇과 만나게 될까? 그 저편에는 전작들에서 이 작가를 압도했던 빛의 만개가 존재할까? 만약 그렇다면 천을 걷어 올리는 순간 이쪽과 저쪽의 빛이 만날 텐데 그러면 어떤 일이 생길까? 질문은 끝이 없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질문에 빠질 여유가 없다. 나는 지금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시각의 진실들에 매료되어 있다. 그 집요한 빛의 이미지들은 즉자적 실체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를 사로잡는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마치 유령처럼 떠돌면서 내 몸과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내 몸에 즐겁다. 또는 보기에 좋다. 마치 아주 감각적인 영화 한편을 볼 때처럼 말이다.

 

홍지석(미술비평)

Painter Chung Chi Yung (정치영, Chi Yung Chung, Chi Chung), Photorealism, Hyperrealism, Trompe-l'œil painting, 포토리얼리즘, 하이퍼리얼리즘, 극사실 회화, 트롱프뢰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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